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 14세 (문단 편집) == 여담 == || [[파일:Equestrian_portrait_louis_xiv_1692.jpg|width=100%]] || || 9년 전쟁 중 나무르 공성전을 지휘하는 루이 14세.[br]피에르 미냐르(Pierre Mignard) 작, 1692년 || * 1666년 '''"내 안에 있는 가장 큰 열정은 영광에 대한 사랑이다."'''라는 글을 썼다. 직접 전쟁터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처음엔 비단으로 만든 천막을 짓고 귀족 부인들을 참모로 데리고 참가했다고 한다. 물론 그 다음부터는 여자들은 두고 왔다. 루이 14세는 뛰어난 군수 공학자인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을 발굴한 사람이기도 하다. * 재위 초반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 병력을 보내 지원할 정도로 오스만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1670년대부터 외교 관계가 급격히 좋아졌다. 1680년대 초 오스만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보이자 루이 14세는 이를 틈타서 스트라스부르와 카잘을 점령했다. 타 국가들은 이에 분노했으나 1683년 드디어 [[제2차 빈 공방전|오스만이 빈을 포위하자]] 전 유럽은 오스만 방면에 쏠리게 되었고, 이 기회에 루이 14세는 [[룩셈부르크|뤽상부르]]와 자르를 점령했다. 분노한 유럽 국가들은 프랑스를 비난했으나 [[레오폴트 1세]]는 프랑스의 점령을 20년만 묵인해주고 20년 뒤에는 회수하며 전쟁에 다시 돌입한다는 라티스본 휴전을 맺었다. 영토를 많이 확보한 루이 14세는 오스만을 멀리하고 유럽과 가까워지고자 했으나 이미 유럽 국가들은 프랑스에 적대적이었고, 반 오스만 동맹에 가담해서 프랑스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중립을 지키며 [[대튀르크 전쟁]]을 관전했으나 1688년부터 오스만이 발칸 전역에서 밀리기 시작하자 루이 14세와 루부아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오스만 주재 프랑스 대사 지라르댕이 술탄이 [[코스탄티니예]]를 버리고 소아시아로 도피할 준비를 하고 있고, 제국군이 코스탄티니예를 정복할 기세라고 전하자 루이 14세와 루부아는 더욱 불안해져서 레겐스부르크 휴전을 영구적인 조약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으나 레오폴트 1세는 거절했는데 오스만과의 전쟁이 끝나면 프랑스를 응징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1688년 9월 [[베오그라드|벨그라드]]가 함락되자 전 유럽은 환호했고 프랑스는 공포에 질렸다. 벨그라드에서 코스탄티니예까지는 지형적 장애물이 별로 없었고, 코스탄티니예까지 제국군의 가시권에 들어왔다. 발칸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났으며 [[파디샤]]에 분노한 오스만인들에 의해 대대적인 반란이 터질 기세였고, 이는 오스만이 [[발칸 반도]] 전역을 빼앗기고 붕괴될 위험을 암시하는 것이었으며 오스트리아는 발칸 거의 전부를 차지할 기세였다. 오스트리아가 발칸 반도를 차지해 세력이 강해지려 하고, 오스만의 붕괴가 임박한 것으로 보이자 놀란 루이 14세와 루부아는 [[팔츠 선제후국]]을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명분은 팔츠 계승 전쟁이었지만 전 유럽이 오스만을 도와주려는 루이 14세의 의도를 파악했고, 격노한 유럽 국가들은 프랑스와 대적했다. 이때 오스만 방면의 신성 동맹군 중에 2/3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보내졌는데 오스만 방면의 신성 동맹군은 허약해졌다. 1690년 초까지 제국군은 계속 진격해서 [[플로브디프]]까지 진군했으나 적고 약해진 병력으로는 오스만을 대적하기 힘들었고 1690년 여름부터 오스만은 반격에 나서 벨그라드를 탈환한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이 맺어질 때 오스만은 여전히 신성 동맹군에게 밀렸지만 1688~1690년의 상황만큼 위태롭지는 않았고, 오스만은 [[오스만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공국|에르데이 공국]]을 내주며 버티는데 성공했다. 1709년 프랑스가 식량난으로 60만명 넘게 굶어 죽고 오스트리아, 잉글랜드, 네덜란드군이 쳐들어와서 프랑스가 위기에 처했을 때 [[영국 해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은 식량을 프랑스에 팔아서 프랑스가 위기를 넘길 수 있게 도와줬다. * 여성편력 등 사생활에서는 영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프랑스를 모두 단 한 사람의 지배 아래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루이 14세의 사상은 곧 종교의 통합으로까지 이어졌다. 그가 훗날에 조부인 [[앙리 4세]]의《[[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위그노]]를 탄압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원인이 크게 작용했다. 온 나라의 신민을 하나로 묶으려는 루이 14세에게 있어서, 시건방지게도 국왕과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잉글랜드 왕국]]-[[그레이트브리튼 왕국|영국]],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 등 [[개신교]]를 국교로 삼은 나라의 [[가톨릭]] 신자들은 프랑스로 망명하기를 희망하였으며, 루이 14세 치세의 프랑스는 이들의 망명을 잘 받아주었다. *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강조하기 위해서, 매일 아침에 드리는 [[미사]]는 결코 빼먹는 일이 없었다. 말년에 걸어서 미사를 드리러 갈 수 없게 되자 [[휠체어]]를 타고 갔을 정도. 그리고 매주 목요일마다 빈민층의 아이들 중 13명을 골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직접 그들의 [[세족식|발을 씻어 주는 의식]]도 치렀는데 이 또한 거르는 일이 없었다. 루이 14세는 국왕이 [[야훼|하느님]]으로부터 막강한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 [[주님 부활 대축일]], [[성령 강림 대축일]], [[모든성인대축일]], [[주님 성탄 대축일]] 때마다 피부병의 일종인 연주창에 걸린 환자들을 어루만지며 그들의 병을 고쳐주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를 도유식 혹은 [[기름 부음]]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제법 유명해서, 세계사 교과서 등에서도 절대주의 시대 국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일화로 소개되기도 한다.] *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마녀사냥]]을 법으로 금지한 왕이기도 했다. 주술을 한 마녀에 대한 사형을 금지했고 그 대신 채찍으로 때리는 형벌로 간소화했다. 자신의 절대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행한 조치였다. * 평생 [[목욕]]을 딱 세 번 했다는 야사가 있을 만큼 목욕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다만 이는 루이 14세가 특별히 청결하지 못했다기보다는 근세 유럽의 위생 관념이 그랬던 것이다.[* [[수인성 전염병|더러운 물로 인한 질병이나 전염병]]에 몇 번 데이고선, 물이 질병의 전파원이라고 여겼다. 근세 유럽에서 물로 목욕을 하는 것은 의사의 처방에 따라 가끔 이루어지는 의료 행위였고, 일상에서는 최대한 기피되었다. 이 때문에 근세 유럽의 청결 수준은 중세 유럽보다도 이전으로 퇴보했다.] 물론 진짜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냄새는 둘째치고 심각한 피부병에 시달렸을 테니. 그래서 루이 14세는 물이나 알코올을 적신 수건으로 땀과 때를 벗겨내고, 남은 냄새는 향수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청결을 유지했다고 한다. * 위장병이 심한 나머지, 속이 좋지 않아 의자에 앉은 채로 똥을 쌌다고 한다. 귀족들의 반응은 글자 그대로 "폐하, 시원하시겠습니다." 왕의 배변 순간에 함께한 사람들 중 일부는 닦아준다던가 등의 뒤처리를 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애초에 왕의 몸은 함부로 만질 수 있는 게 아닐 뿐더러, 남에게 [[항문]]을 맡긴다는 것은 굉장히 큰 빈틈을 보이는 것인 만큼[* 그 예로 독일의 제후 고트프리트 4세는 볼일을 보던 중 들이닥친 반란군의 습격으로 중요부위를 찔려 급사했다는 얘기가 있다.] 암살 위험 등이 없다고 확신하는 굉장한 신뢰관계를 표시하는 것이기도 했기에, 왕의 뒤를 닦아주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바다 건너 [[헨리 8세]]도 시종 중에 자신의 뒤를 닦아주는 걸 전담하는 '청결관'이라는 직책을 뒀었는데, 그 중에는 후작급의 고관도 있었다고 한다. * 당시 유럽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장의 상태는 텅 빈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실제로 1800년대에도 웬만한 병은 다 [[관장]]으로 치료했다. 자연과학의 발전이 의학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였다.] 왕에게 '''다량의 설사약'''을 먹였고, 그것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늘 용변을 보고 산 원인이 되었다. 또한 평소에 식습관의 영향으로 충치에 시달렸기 때문에 이빨을 다 뺄 수밖에 없었는데, 의사가 이빨을 빼는 과정에서 입천장을 지져서 뚫어버렸기 때문에 입천장에 음식물이 올라오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루이 14세는 화장실 변기에 앉은 채 나랏일을 보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이런 습관 때문에 [[치질]](치루)에 걸려 고통을 겪었고,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신하들이 같은 방에 있는 상태에서 '''[[마취]]도 없이(!)''' 수술을 받는 동안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신하들 앞에서 위엄을 지키기 위한 놀라운 자제력을 가진 인간이었다. 사실 당시의 의학기술로는 이 수술 자체가 대단히 위험했기 때문에, [[인체실험|비슷한 증세를 가진 수많은 평민들을 가지고 시험]]해 본 후 수술을 받았다. 완쾌는 되어서 그 이전에는 이발사들이 겸하던 외과의사의 위상이 크게 올라가는 영향이 있었다. * 전술한 루이 14세의 용변 등으로 인해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실이 없다는 속설이 널리 퍼져 있는데, 원래 베르사유에는 화장실과 욕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으며, 왕실 전용 외의 화장실들도 여러 군데 설치되어 있었다. 베르사유의 증축이 한창이던 루이 14세 때 베르사유 궁전의 평면도를 보더라도 옷방과 용변실들이 체계적으로 갖추어져 있었는데, 루이 14세 치세 말기에는 돈을 더욱더 들여 용변실을 보다 세련된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시설도 최신식으로 개선하여 면제품을 보관하는 벽장과 2개의 욕조 및 하수관 등을 갖췄으며 대리석 바닥은 고인 물을 흘려보내기 위해 지하 배수로 쪽으로 기울어지게 설계하고 바닥 밑에는 방수를 위해 납판이 깔렸다. 벽난로는 도자기로 된 난로로 대체하였으며 용변을 위한 변소실에는 탱크로 연결된 분사장치를 갖춘 최신 영국식 변기가 설치되었고, 전문적으로 청소하는 일꾼들을 구하여 수시로 왕궁을 비우고 가까운 트리아농에 체류해 청결을 유지하기 위한 대청소를 시켰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인 18세기, 베르사유 궁전은 텅 비었고, 이후 루이 필리프 시대때 궁전을 박물관 용도로 쓰기 시작하면서 옷방과 욕실, 변소, 다용도실을 대부분 다 없애는 공간 개조작업이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현존하는 베르사유 궁전에는 과시용 공간만 남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베르사유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킬힐을 만들었다"는 무지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차라리 베르사유 때문이 아니라 당시 유럽의 통행로가 지저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으며, 그마저도 후대의 조사 결과 사실이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킬힐은 원래 [[기병]]용 군화에서 시작된 신발이었다. 발을 등자에 고정시키기 위해서 굽이 그런 모양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베르사유의 불결함은 루이 14세의 개방으로 몰려든 수많은 외부 관광객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피에르 구베르를 포함한 학자들의 공통된 주류 사인이고,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이런 일부에 불과한 셈이다. 즉, 불결한 베르사유는 부르봉 왕조를 비꼬기 위한 우스갯소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참고 논문은 프랑스 사학계의 권위자 피에르 구베르의 <바로크의 환상>에서 참조. * 중년 이후에는 [[중풍]]에 걸리고 치아질환, 소화기질환으로 인한 설사병[* 나중에 루이 14세가 사망하고 나서 [[의사]]들이 부검을 해보니, 과식으로 인해 위와 장이 일반인보다 3배나 부풀어 있었다.], 유동식만 섭취한 데에서 오는 영양부족 등으로 몸이 좋지 않아 늘 누워 있었는데[* 그가 앓았던 병만 해도 [[당뇨]], 괴저병, [[말라리아]]와 말라리아로 인한 [[탈모]], [[임질]], [[중풍]], 치질, 원인모를 발열과 피부염, [[천연두]], [[충치]], [[류머티즘]], 과식으로 인한 두통과 [[장염]], [[소화불량]] 등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죽기 30년 전부터 이미 윗니가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삶은 계란을 좋아했을 만하다.] 초상화에서 보는 당당한 포즈들은 사실 상상으로 그려진 것이다.[* 실제로 맨 위에 항목에 나와있는 초상화는 그의 나이 60세가 넘어간 시점에서 그려진 것이다.] 물론 루이 14세 본인은 그런 초상화에 크게 만족했다고. 다만 그 고통 속에서도 하루 7시간 넘게 앉아서 공무를 처리하고 매끼 기름지고 고칼로리 투성인 식사를 공개적으로 3~4시간 넘게 먹어대고 거기에 시간을 내어 애첩들을 만나러 다녔다.[* 이러한 그의 정력적인 면은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이어졌다.] 당시 기준으로 엄청 오래 산 76세까지 장수했으니 나름 관리를 하긴 한 것으로 보인다. * 개를 좋아해 자신의 사냥개들의 초상화를 주문하고 집까지 따로 만들어줄 정도로 남다른 개 사랑을 보였다. 반면 고양이는 아주 싫어해 [[30년 전쟁]] 종전 기념을 축하할 당시 10세의 나이임에도 고양이를 집어다가 불구덩이에 떨어뜨려 태워죽이기도 했고, 이후 액땜이나 여러 행사로 고양이를 태워죽이는 일을 여럿 벌였다. 증손자인 [[루이 15세]]가 수십마리 고양이를 궁궐 안에 키우고 고양이 담당관까지 뒀던 것과는 대조적. * '''[[각선미]]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그의 [[초상화]]를 보면 하나같이 다리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당시 왕을 그리는 작화법을 따랐다는 설도 있다. 당시에는 [[어진]]을 그릴 때 지혜를 상징하는 머리는 노년의 지혜를 상징할 수 있게 중후하게 그리고, 다리는 현실의 통치체계 위에 굳건하게 토대를 둠을 암시하는 청년의 다리를 그려넣었다. 이를 <왕권 이체설>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루이 14세의 그림 역시 다리가 유난히 젊게 그려져 있다.] 젊은 시절의 루이 14세는 상당한 외모와 각선미, 춤솜씨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루이 14세는 [[발레]]를 배웠다고 하며 자신의 권위와 카리스마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을 즐겼으며 이 방법으로 제법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30세가 되었을 때 춤추기를 그만뒀는데 그 이유는 몸이 안 따라줬다거나 취미가 바뀌어 흥미를 잃어서가 아니었다. 국민들 사이에서 자기 별명이 "발레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양만두]]는 [[https://youtu.be/hpgLuRFjxME|발레의 역사를 소개한 동영상]]에서 루이 14세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무용수"라고 평했다.] * 젊은 시절에 그린 초상화나 흉상 등을 보면 잘생긴 [[미남]]이었다. 흠이 있다면, 흉상에서도 표현되어 있듯이 뺨과 이마에 천연두로 인한 가벼운 마마 자국이 생겼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두꺼운 화장으로 커버가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젊은 나이에 심한 말라리아로 거의 죽다 살아난 후에는 그 후유증으로 '''탈모가 일찍 찾아와서 [[가발]]을 맞춰야 했다'''. * 동시대 만주 [[청나라]]의 황제인 성조 [[강희제]]와 비록 직접적으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서로 서찰을 주고받으며 교류를 했던 적도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3651|있다]]. 공통점도 많은 편이지만 하지만 정작 루이 14세 본인은 오히려 강희제의 손자인 고종 [[건륭제]]와 유사점이 많은 편이다.[* 강희제는 [[트라야누스]]와 자주 비교된다.] 둘 다 재위 도중에 제국이 최대로 융성했지만, 끝을 모르는 [[사치]]로 인해 후반부에 암군을 인증해버린 흡사점 때문이다. 애초에 루이 14세가 [[대왕]]이라고 안 불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간혹 루이 14세를 대왕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이는 그의 절대 권력 앞에 귀족들이 왕에게 아부하기 위해 붙인 문구이다. * 평소에는 워낙 바빠서 가족들에게 무심한 듯 보였지만, 실은 혈육들을 끔찍히 아끼던 감성의 소유자였다. 평소에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왕태자 [[그랑 도팽 루이]]가 자신보다 먼저 죽어버리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실신할 뻔했고, 이후로도 자손들이 연이어 전염병으로 죽어나갈 때에도 무척 비통해했다. 손자인 [[펠리페 5세]]가 1700년에 스페인 왕위 계승을 위해 떠날 때도 어린 손자를 걱정하며 서로 끌어안고 펑펑 울어서 그걸 본 아버지인 왕태자를 위시한 주변 사람들도 똑같이 울어 재끼는 바람에 성 전체가 울음바다가 된 적이 있었다. * 루이 14세의 치세에 대해 비판적으로 본 당대의 사람들 중 유명한 사람은 [[생시몽 공작]]이 있다. 그가 루이 14세의 치세를 비판한 《회고록》은 당시 시대의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국내에는 현재 《루이 14세와 베르사유 궁정》이라는 이름으로 일부가 번역되어 정발되어 있다. * 반면 [[볼테르]]는 권위적인 것을 싫어하는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 14세를 좋아했다. "그의 이름은 존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서는, 그리고 영원히 기억될 시대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고서는 입에 올릴 수가 없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청을 받아 [[프로이센 왕국]]에서 《루이 14세의 시대》(Le Siècle de Louis XIV, 1751)라는 역사서도 집필했다. * 유명 패션 브랜드 [[루이까또즈]]는 브랜드명 자체가 루이 14세를 의미한다. [[프랑스어]]로 숫자 [[14]]가 까또즈(Quatorze)이다. * 루이 14세가 발언한 것으로 유명한 말로 '''"[[짐이 곧 국가다]]" (L'État, c'est moi)'''가 있으나 실제로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